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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나무 꽃말: 사양, 無口 대부분의 활엽수들이 뿌리로 양분 저장을 마치고 옷을 벗고 겨울 채비를 할 때 단풍나뭇잎은 겨우내 나뭇가지에 붙어 있으려 한답니다. 그 화려했던 단풍잎의 모습은 없고 만지면 부숴질만큼 말랐으면서도 잎자루 끝의 "겨울눈"을 보호한답니다. 새로운 탄생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줄 아는 것~!! 누가 가르쳐 주었을까요? 사진/글
마리안젤라님
2014년 12월 생활말씀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 주어라.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3,11) 성탄을 준비하는 이 대림시기에, 우리는 다시 세례자 요한을 생각하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메시아의 임하심을 위한 길을 닦도록 요한을 보내셨습니다. 요한은 자기를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루카 3,8)고 하면서 삶의 근본에서부터 변화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루카 3,10)라고 묻는 사람들에게는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왜 그렇게 해야 할까요? 하느님께서 나를 창조하셨듯이, 다른 사람도 창조하셨기 때문에 다른 사람은 나의 형제요, 나의 자매입니다. 그 사람은 곧, 나의 한 부분입니다. “내가 너에게 상처를 줄 때마다 나 또한 상처를 입는다.”라고 간디는 말했습니다. 우리는 사랑이신 하느님의 모습, 모상(模像)에 따라, 서로 상대편에게 선물이 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우리의 피 속에는 사랑이라는 거룩한 법이 새겨져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가운데 오시어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는 새 계명을 주심으로써, 이를 우리에게 분명히 알려 주셨습니다. 이것은 ‘하늘의 법’입니다. 성삼위의 삶이 땅 위에 내려온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하늘에서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께서 충만한 일치를 이루어 단 하나가 되시듯이(요한 17,11 참조) 우리도 이 땅 위에서 서로 사랑하는 그만큼 우리 자신의 참된 모습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자(聖子)께서는 성부(聖父), 하느님 아버지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저의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고 아버지의 것은 제 것입니다”(요한 17,10). 우리도 이처럼 영신적 재산뿐 아니라 물질적 재산도 서로 나눌 때, 비로소 우리 사이에 사랑이 충만히 실현됩니다. 우리 이웃 중에 누군가 무엇을 필요로 한다면, 우리 모두 자신이 그것을 필요로 한다고 느껴야 합니다. 누군가에게 직장이 없습니까? 그렇다면 내게도 직장이 없는 것입니다. 어머니가 병석에 계신 사람이 있습니까? 내 어머니인 듯 그 어머니를 도와드려야 합니다. 배고픈 사람들이 있습니까? 내가 배고픈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나 자신을 위해 음식을 구하듯이 그들을 위해 양식을 구해야 합니다. 예루살렘의 초대교회 신자들은 이를 체험했습니다. “신자들의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사도행전 4,32). 물질의 공유가 의무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은 이를 열심히 실천했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말하듯, 이 사람의 형편이 나아지게 하기 위해서 저 사람을 궁핍하게 하고 괴롭히자는 것이 아니라, 균형을 이루게 하자는 것입니다(2코린 8,13 참조). 체사레아(Cesarea) 출신인 바실리오(Basilio) 성인(聖人)은 “당신이 모아 둔 그 빵은 배를 곯는 사람의 것입니다. 당신이 큰 가방에 넣어 둔 그 외투는 헐벗은 사람의 것입니다. 당신이 숨겨 둔, 그 돈 또한 가난한 사람들의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말합니다. “부자들에게 남는 여분의 것은 가난한 사람들의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 역시 그들끼리 서로 도울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다리가 불구인 사람을 위해 다리가 되어 줄 수 있고, 다른 사람은 맹인의 눈이 되어 그를 인도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환자들을 방문할 수 있습니다.”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오늘날에도 우리는 초대 그리스도인들처럼 살 수 있습니다. 복음은 유토피아와 같은 헛된 꿈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새로운 교회운동단체들을 보면 이를 알 수 있습니다. 이 운동단체들은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복음적인 철저함을 신선하게 다시 살도록, 또 불의와 가난이 이토록 만연한 오늘날 사회의 거대한 도전에 답하고자 성령께서 교회 안에 불러일으키신 것입니다. 저는 포콜라레운동의 초창기, 새로운 카리스마가 우리의 마음속에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아주 특별한 사랑을 심어 주던 때를 기억합니다. 길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만나면, 우리는 수첩에 그들의 주소를 기록해 두었다가 찾아가 도와주곤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오 25,40)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누추한 집을 찾아가 그들을 만난 다음, 우리 집으로 그들을 초대하여 함께 식사를 하곤 했습니다. 그들을 위해 가장 아름다운 식탁보를 깔고 가장 좋은 수저를 놓고, 가장 맛있는 음식을 준비했습니다. 첫 포콜라레에서는 한 포콜라리나, 그 옆에 가난한 사람, 다시 한 포콜라리나, 그 옆에 가난한 사람, 이런 식으로 차례로 식탁에 둘러앉아 식사를 했습니다. 그러던 중 한번은 주님께서 바로 우리가 가난해지기를 원하신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가난한 사람들과 모든 사람들에게 봉사할 수 있도록 그렇게 청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첫 포콜라레에서 우리는 각자 자신이 여분으로 가지고 있다고 여기는 것들을 방 한가운데에 내어놓았습니다. 외투 한 벌, 장갑 한 켤레, 모자, 그리고 모피 코트 한 벌도……. 이제 오늘날 우리에게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내어주고자 일자리를 마련하고, 이익금을 내어놓는 기업체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해야 할 일은 계속 많이 있습니다.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의외로 우리에게는 함께 나눌 부유함이 많습니다. 우리는 감수성을 섬세하게 다듬고 지식을 습득함으로써, 나중에 구체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고 형제애를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따뜻한 마음의 정을 줄 수 있고, 상냥하고 친절한 태도를 보여줄 수도 있으며, 기쁨을 다른 이들에게 전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시간을 내어놓을 수가 있고, 기도할 수도 있으며, 내면의 부(富)를 음성으로나 글로 공유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때로는 물건, 가방, 펜, 책, 돈, 집, 자동차 등도 공동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내어놓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장차 쓸모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많은 것들을 쌓아 두고 있는 동안, 그 곁에는 당장 그것들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식물이 땅에서 자기에게 필요한 수분만 흡수하듯이, 우리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만을 가지려고 노력합시다. 그리고 가끔은 무언가 부족한 것을 느끼는 편이 낫습니다. 좀 부유한 것보다는 약간 가난한 것이 낫습니다. 바실리오 성인은 “만일 우리 모두가 꼭 필요한 것들만을 갖고 만족한다면, 그리고 남는 것은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준다면, 더 이상 부자도 없고, 가난한 사람도 없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이렇게 해 보도록 합시다. 이렇게 살기 시작합시다. 예수님께서는 반드시 우리에게 백배의 상을 보내 주실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계속해서 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 날에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어느 누구에게 내준 것이든 다 그분께 드린 것이라고 말입니다. 끼아라 루빅 이 글은 2003년 12월에 쓰인 생활말씀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