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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목 (꽃말: 고상함) 함백산행서 여러그루의 주목을 만났어요. 살아서 천년 죽어서 천년을 산다하지요. 오랜세월의 흔적을 지닌 나무앞에선 경건함을 지니게 되어요. 댜양한 문화를 지녔던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던 나무는 날 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나~~ "마실물좀 다오" 라고 청하시는 그분의 초대에 "예" 라 답하렵니다~!! 사진/글
마리안젤라님
2015년 1월 생활말씀 <<예수님께서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 하고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요한 4,7). 예수님께서는 유다 지방을 떠나 갈릴래아를 향해 가시는 길에 사마리아를 가로지르셔야 했습니다. 정오 무렵 뜨거운 태양 아래 길을 걷느라 지치신 예수님께서는 1700년 전 조상 야곱이 만들어 놓은 우물가에 앉으셨습니다. 목이 마르셨지만 물을 길을 두레박이 없었습니다. 우물은 깊었습니다. 35미터 깊이의 이 우물은 지금 이 시대에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먹을 것을 사러 고을로 갔고 예수님께서는 홀로 남아계셨습니다. 이 때 물동이를 든 여자가 도착했고 예수님께서는 거침없이 그 여자에게 마실 물을 청하십니다. 이는 당시의 관례를 거스르는 요청이었습니다. 남자들은 여자에게, 무엇보다 모르는 여자에게 직접 말을 건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유다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에는 종교적 불화와 편견이 있었는데 예수님은 유다인이고 그 여자는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역사적, 정치적으로 두 민족 사이에는 반목과 증오의 뿌리가 깊었습니다. 더우기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자 사이에는 일종의 도덕적인 장애물이 놓여 있었습니다. 사마리아 여자는 여러 남자들과 살아오며 법도에 어긋난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마 그 때문에 아침이나 저녁 나절 다른 여인들과 함께 오지 않고, 이목을 피해 그런 뜻밖의 시각인 정오에 물을 길으러 왔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어떤 종류의 장벽에도 아랑곳없이 이방인 여성과 대화를 시작하십니다. 그분께서는 그 여자의 마음 안으로 들어가고자 하시며 이렇게 청하십니다.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 예수님은 그 여자에게 줄 선물을 간직하고 계셨습니다. 그 선물은 바로 “살아 있는 물”입니다. 우리는 나중에 그분께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고 큰 소리로 말씀하시는 것을 듣게 될 것입니다(7,37). 물은 모든 생명에 필수적인 요소로서, 팔레스티나 같이 건조한 곳에서는 더욱 귀하게 여겨지기 마련입니다. 예수님께서 선사하고자 하시는 물은 “살아 있는” 물입니다. 이 물은 사랑이신 성부 하느님과 성령, 그리고 예수님께서 직접 전해 주러 오신 거룩한 삶에 대한 계시를 상징합니다. 그분께서 선사하시는 것은 모두 살아 있으며, 생명을 위한 것입니다. 바로 그분께서 “살아 있는” 빵이시고(6,51 참조), 생명을 주는 말씀이시며(5,25 참조), 생명 자체이십니다(11,25-26 참조). 또한 십자가 위에서 군사 하나가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찔렀을 때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고, 이를 목격한 요한 복음사가는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극단적으로 당신 자신을 온전히 내어 주신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심지어 법도에 어긋난 동거생활에 대해서도 그 여자를 나무라지 않으십니다. 모든 것을 주실 수 있으신 그분께서는 대신 청하십니다. 실제로 그분께는 그 여자가 주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 그분은 지치고 목마르기에 청하십니다. 생명의 주인이신 그분께서는 당신의 참된 인성을 감추지 않으시고 구걸하십니다. 그분은 상대방이 내어 주면서 더욱 쉽사리 자신을 열 수 있고, 또 받아들일 준비가 될 수 있음을 아시기 때문에 청하십니다. 이 요청에서 논쟁과 오해를 거쳐 더 깊은 이해에 이르는 대화가 시작됩니다. 이 대화가 끝나갈 무렵 예수님께서는 마침내 당신이 누구이신지 드러내 보여주십니다. 이 대화는 방어벽을 무너뜨리면서 예수님께서 전해 주러 오신 생수인 진리를 발견하게 해 주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 여인은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물동이를 버려두고 가는데, 다른 부요함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 여자도 가까운 이웃들과 대화를 시작하기 위해 고을로 달려갑니다. 그 여자 역시 강요하지 않고, 그저 있었던 일을 얘기하고 자신이 경험한 것을 전해 주며, 다음과 같은 요청을 하셨던 그가 만난 분에 대한 궁금증을 불러 일으킵니다.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 복음의 이 대목에서 우리는, 해마다 이 달이면 그 시급성을 상기하게 되는 교회일치를 위한 대화에 필요한 가르침을 얻을 수 있을 듯합니다. “그리스도인 일치를 위한 기도 주간”은 우리에게 오랜 세월 지속되고 있는 교회 분열이라는 수치스러운 현실을 자각하게 해 주며, 예수님께서 유다인과 사마리아인들 사이의 간극을 극복하셨듯이 모든 장벽을 뛰어넘은 깊은 친교의 시기를 앞당기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분열은 여러 다양한 상황에서 우리를 갈라 놓는 수많은 불일치의 하나에 불과합니다. 가정에서의 불화나 아파트 주민들 사이의 오해와 반목, 일터에서의 압박감, 이주민들에 대한 적대감 등으로 불일치가 빚어지기도 합니다. 흔히 사회적, 정치적, 종교적 장벽 등이 우리를 갈라 놓기도 하며, 더러는 단순히 우리가 다양한 문화적 관습을 수용할 줄 모르기 때문에 그런 상황이 빚어지기도 합니다. 이는 국가와 민족들 간의 분쟁을 야기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우리가 살아가는 동네에서 대립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서로의 다름과 편견을 극복하고 상대방에게 마음을 열 수는 없을까요? 우리의 고정관념을 깨고 이해나 도움, 약간의 주의를 기울여 줄 것을 요청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어떨까요? 우리와 반대편에 있거나, 문화, 종교, 사회적으로 전혀 다른 사람 안에도 예수님께서 숨어 계시며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
이와 유사하게, 다시 요한 복음에서 증언하는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말씀하신 “목마르다”라는 말씀이 절로 떠오릅니다(19,38). 이는 그외의 다른 모든 결핍을 대변하는 근원적인 결핍입니다. 불우한 이, 실직자, 외로운 이, 외국인 등, 신앙이나 종교적 신념이 다르건, 적대적이건 우리는 그들 안에서 우리에게 “목마르다”고 말씀하시며,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라고 청하시는 예수님을 볼 수 있습니다. 복음에서 말하듯이, 물 한 잔을 건네주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상을 받게 될 것이며(마태 10,42 참조), 형제애를 재건하는 그 대화가 시작될 수 있습니다. 우리 역시 때로 “목마르다”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면서 자신이 필요로 하는 것을 표현할 수 있으며,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달라”고 청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다름을 두려워하지 않고, 우리의 생각을 나누고 상대방의 생각을 받아들이는 것에 따르는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진솔한 대화, 구체적인 친교가 시작될 수 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그 사마리아 여자에게서 당신은 하실 수 없었던 그 무엇, 곧 물을 길어 올릴 수 있다는 점을 알아보셨듯이, 우리 앞에 있는 사람의 잠재력과 비록 감춰져 있더라도 그가 지닌 가치들을 이끌어낼 수 있을 것입니다. 파비오 챠르디 신부
2015년 1월부터는 오블라띠 선교 수도회(O.M.I) 소속 파비오 챠르디 (Fabbio Ciardi)수사신부가 생활말씀 해설을 맡게 됩니다. 라테라노 대학교 영성신학교수로 재직했던 파비오 챠르디신부는 <친교를 사는 사람들>외에 다수의 저서를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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