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개별꽃 (꽃말:은하수)

석죽과 여려해살이풀에요. 숲속그늘 어디서나 지천으로 피어 있어 쉽게 만나는 들꽃 겸손하게 무릎꿇고 들여다보면 1cm쯤의 작은 꽃들은 다 달라요. 하물며 사람이야~

다양성의 나눔이 우리를 하나로 모아 줄 것이란 생각이 드네요~~!! 사진/글  마리안젤라님

2015년 2월 생활말씀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기꺼이 받아들이신 것처럼 여러분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서로 기꺼이 받아들이십시오.” (로마 15,7)

 

로마를 거쳐 스페인으로 가려던 바오로 사도는 그에 앞서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 공동체들에 편지를 보냅니다. 머지 않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이들의 순교로 깊고도 진지하게 복음을 따르고 증거하게 되는 이 도시의 그리스도인 공동체에는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긴장과 오해, 심지어 경쟁 의식 또한 없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로마의 그리스도교인들은 사회, 문화, 종교적으로 다양한 배경을 지닌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유다교 출신이나, 헬레니즘 문화권 혹은 로마의 고대 종교 출신의 사람들이 있었고, 스토아 학파(역주 - 고대 그리스의 금욕주의적 철학사상)를 비롯하여 다양한 철학적 성향을 지닌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들은 각자 나름의 전통에 따른 사고와 도덕적 신념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몇몇 사람들에게는 “믿음이 약한 이들”이라는 단서가 붙었는데, 그들이 유별난 식습관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가령 채식만을 하거나 특정한 단식일을 지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믿음이 강한 이들”로 일컬어졌는데, 이런 제약에서 자유로워 음식의 금기나 특별한 관례에 묶여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들 모두에게 이렇게 간곡히 부탁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기꺼이 받아들이신 것처럼 여러분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서로 기꺼이 받아들이십시오.”

바오로 사도는 이 서간에서 이미 앞서 이 주제를 다루면서 먼저 “믿음이 강한 이들”을 향해 “여러 견해를 두고 논쟁하지 말고” “믿음이 약한 이들”을 기꺼이 받아들이라고 초대했습니다. 또 “믿음이 약한 이들”에게는 “믿음이 강한 이들”을 심판하지 말고 기꺼이 받아들이라고 권고합니다. 하느님께서 그들을 “기꺼이 받아들이셨기” 때문입니다. 사실 바오로 사도는 비록 각자 견해나 관습은 다르지만, 저마다 주님께 대한 사랑으로 행동한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러므로 나와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을 심판할 이유가 없고, 더더욱 거만한 행동이나 우월감을 지니고 물의를 일으켜서는 안 될 것이며, 그보다는 모든 이의 선익과 “서로의 성장”, 곧 공동체의 건설과 일치를 지향해야 한다고 했습니다(14, 1-23 참조). 이 경우에도 이 서간의 조금 앞 부분에서 바오로 사도가 상기시켜 주었듯이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13,10)라는 그리스도인 삶의 커다란 규범을 적용시킬 수 있습니다.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이 더 이상 “사랑에 따라”(14,15) 행동하지 않게 되자 각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영혼을 불어넣어 주어야 하는 형제애의 정신 또한 줄어든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서로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좋은 모범으로 예수님의 경우를 제시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돌아가시면서 당신 좋으실 대로 하지 않으시고 몸소 우리의 나약함을 취하셨기 때문입니다(15,1-3 참조).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모두를 당신 자신께로 이끄시면서 유다인 요한과 함께 로마인 백인대장을, 마리아 막달레나와 함께 당신과 더불어 십자가에 못박힌 죄인들을 기꺼이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기꺼이 받아들이신 것처럼 여러분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서로 기꺼이 받아들이십시오.”

 

우리의 그리스도 공동체에서도 모두가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이들로서 하느님께 사랑받는” (1,7) 이들이지만 로마의 공동체와 마찬가지로 서로 간의 시각차와 종종 너무나 동떨어진 문화적 차이에 따른 불화와 갈등이 없지 않습니다. 다소 지나치게 단순화시킨 표현인 듯하지만,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용어로 말하자면, 흔히 보수파와 혁신파로 대립하기도 하고, 더 열려 있거나 더 닫혀 있는 사람들, 좀 더 그리스도교 사회교리에 관심을 갖고 있거나 좀 더 영성적인 면에 관심을 갖는 이들로 나뉘기도 합니다. 이런 다양성은 각자의 정치적 신념과 서로 다른 사회적 배경에 따라 조성됩니다. 또 현재의 이주민 현황으로 우리의 전례 모임이나 여러 교회 단체들에도 문화적으로도 다양하고 출신지도 다양한 새로운 구성원들이 모여들게 되었습니다. 이런 역동적인 움직임이 여러 교파의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관계에서 생겨날 수 있으며, 가정이나 직장에서, 혹은 정치 상황에서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서 메마른 대립과 서로를 받아들이지 않는 상황 속에서 우리처럼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쉽게 판단하고 자신들이 우월하다고 여기고 싶은 유혹이 스며들게 됩니다. 바오로 사도가 제시하는 모범은 전부를 똑같이 만드는 획일주의가 아니라 더 풍요롭게 해 주는 다양성의 나눔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앞서 이 서간에서 몸은 하나이지만 다양한 지체에 대해 말하고, 다양한 은사가 공동체를 풍요롭게 하며 활성화시킨다는 언급을 한 것이 그저 우연은 아닐 것입니다(12,3-13 참조).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을 빌자면, 그 모델은 각 지점에서 중심에 이르는 거리가 저마다 같고 각 지점들 간에 그 어떤 차이도 없는 구체(球體)가 아닙니다. 그 모델은 다면체입니다. 다면체에는 여러 면이 있어서 비대칭을 이루고, 각 부분마다 나름의 개성이 있습니다. “잘못을 저질러 논란의 여지가 있는 사람들조차 저마다 기여할 수 있는 무언가를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를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이는 보편 질서 속에서 자신의 고유성을 간직하는 민족들의 집합입니다. 그리고 이는 공동선을 추구하는 사회, 참으로 모두를 포용하는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총합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기꺼이 받아들이신 것처럼 여러분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서로 기꺼이 받아들이십시오.”

 

이 생활말씀은 다른 사람이 갖고 있는 긍정적인 면을 인정하라는 간곡한 초대입니다. 적어도 그리스도께서는 나라면 쉽게 심판하게 되는 그 사람을 위해서도 목숨을 주셨다는 사실에서 그렇습니다. 그러니 방어심을 허물고 경청하며, 변화에 열려 있고, 존중심과 사랑으로 다양성을 기꺼이 받아들임으로써 다원적이면서도 동시에 일치된 공동체를 만들어 가라는 초대입니다. 독일 복음 교회는 2015년 한 해 동안 교회 구성원들이 이 말씀을 실천하며 빛으로 삼을 수 있도록 이 말씀을 선택했습니다. 적어도 이달 동안 여러 교파 교회의 신자들 사이에서 이 말씀을 함께 나눔으로써 그것이 참으로 상호 수용의 시작이 되었으면 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한마음 한목소리로 하느님께 찬양을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15,6), 제네바의 생 피에르 개혁교회당에서 끼아라 루빅이 말했듯이 “지금 이 시기는 [...] 우리 각자에게 사랑을 청합니다. 일치를, 친교를, 연대성을 청합니다. 또한 여러 교파 교회에는 수세기 동안 갈라진 일치를 다시 이루도록 청합니다. 이는 하늘이 우리에게 청하는 개혁 중의 개혁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보편적 형제애를 향해 나아가기 위해 반드시 내디뎌야 할 첫 발걸음입니다. 참으로 세상은 우리가 일치되어 있다면 믿게 될 것입니다.”

 

 

파비오차르디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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