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딸나무:층층나무과

꽃말:  견고함, 희망

꽃은 6월에 피고 4개의 십자모양, 꽃잎같은 하얀 포의 가운데가 꽃이랍니다.

열매가 딸기처럼 붉고 크게 열려서 새들이 무척 좋아해요

구전으로 유럽에서는 예수님이 짊어지신 십자가를 만든나무라 신성시하기도 해요.

함께 지면 가벼워 진단다는 희망에 십자가를 기꺼이 받아들이기로~~!!

 사진/글 마리안젤라

 

2015년 3월 생활말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마르 8,34)

갈릴래아 북쪽 카이사리아 필리피 근처 마을들을 두루 다니시던 중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는지 물으십니다. 베드로는 모두의 이름으로, 스승님은 오랜 세월 기다려 온 메시아 그리스도이시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잘못 이해하지 않도록, 당신의 사명을 이행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명백히 설명하십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당신 백성을 해방시키시겠지만, 전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당신께서 몸소 그 값을 치르실 텐데, 많은 고난을 겪으시고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설명하십니다. 베드로는 이런 관점의 메시아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 시대의 다른 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베드로는 메시아를, 권능과 힘으로 로마인들을 제압하고 세상에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그에 걸맞는 위치에 놓아 주실 분으로 그려 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님께 반박했고,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그를 이렇게 꾸짖으십니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마르 8,31-33 참조).

예수님께서는 여정을 계속하시며 이번에는 예루살렘을 향해 가십니다. 그곳에서 예수님께서는 장차 죽음과 부활에 이르는 당신 숙명을 완수하시게 될 것입니다. 이제 그분께서 죽으러 가신다는 것을 알고 있는 그분의 제자들은 계속해 그분을 따르려 할까요? 예수님께서 청하시는 조건들은 명확하고도 까다롭습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주위로 제자와 군중들을 불러 모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예수님께서 호숫가를 지나가실 때 물고기를 잡기 위해 그물을 던지고 있었거나, 세관에 앉아 있었던 제자들은 스승이신 예수님께 매료되어 그분 뒤를 따르기 위해 지체 없이 배와 그물, 세관, 아버지, 집, 가정을 버렸습니다. 그들은 그분이 기적을 일으키시는 것을 보았으며, 그분의 지혜로운 말씀들을 들었습니다. 그렇게 그 순간까지 기쁨과 열정에 휩싸여 그분을 따랐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한층 더 힘겨운 일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그분의 삶과 운명을 온전히 함께 나누는 것을 뜻한다는 것임이 분명해졌습니다. 곧 실패와 적개심, 심지어 죽음까지도 나누는 것입니다. 게다가 어떤 죽음이었는지요! 살인자들이나 극히 흉악한 범죄자들에게나 해당되는 가장 고통스럽고 가장 불명예스러운 죽음이었습니다. 성서에서 “저주를 받은” 것으로 일컬은 죽음이었습니다(신명 21,23 참조). ‘십자가’라는 명칭만으로도 공포를 일으켰으며, 거의 감히 발설할 수 없는 무엇이었습니다. 이 단어가 복음에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듣던 이들에게 그 단어가 어떤 인상을 남겼을지 모르겠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누구이신지 분명히 말씀하셨으니, 마찬가지로 분명하게 당신 제자의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실 수 있습니다. 스승이 십자가를 지고 그들을 위해 죽기까지 백성을 사랑하신 분이라면, 그분의 제자 역시 모든 면에서 스승의 길을 따르기 위해 자신의 사고 방식을 한편으로 치워 두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가 그 시작이 될 것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또 다른 그리스도가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간직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리 2,5.8)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바오로 사도와 더불어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20)라고 말하고,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 외에는” (1코린 2,2)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고 말하기에 이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계속해서 우리 안에서 살아가시고, 죽으시며, 부활하시는 분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가장 큰 열망이자 꿈입니다. 위대한 성인들을 만들어 낸 그 원대한 꿈은 바로 스승님처럼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려면 어떻게 예수님을 따라야 할까요?

첫걸음은 “자신을 버리는” 것입니다. 자신의 사고방식과 거리를 두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던 베드로를 꾸짖으시며 예수님께서 그에게 요청하셨던 것이 바로 이 발걸음을 내딛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도 베드로처럼 때로는 이기적으로 혹은 적어도 자신의 기준에 따라 자기주장을 하려 합니다. 아무 어려움 없는 쉽고 즉각적인 성공을 추구하며, 성공가도를 달리는 이들을 부러워하는 눈길로 바라보고, 비싼 대가를 지불하려는 각오 없이 일치된 가정을 이루려 하거나, 형제애가 있는 사회,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를 주변에 건설하려는 꿈을 꿉니다.

자신을 버리는 것은 하느님의 사고방식 속으로, 예수님께서 당신의 행적으로 우리에게 보여주셨던 그 사고방식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은 곧 열매를 맺기 위해 죽어야 하는 밀알의 논리이며, 받기보다 주는 것에서 더 큰 기쁨을 찾는 논리, 사랑을 위해 삶을 내어 주는 논리, 한마디로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지는 논리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루카 복음에서 말하듯이 “날마다” 다가오는 십자가는(9,23) 수천의 얼굴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질병, 실직, 가정에서나 직업적으로 문제를 감당해 낼 수 없는 무능력, 참된 관계를 맺지 못하는 데서 오는 실패감, 세계적인 큰 분쟁 앞에서 느끼는 무력감, 우리 사회에서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비리 들로 인한 분노 등… 십자가를 따로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십자가는 아마 우리가 전혀 예상하지 않은 순간,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저절로 우리에게 다가올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라고” 청하십니다. 마치 불가피한 악처럼 체념하듯 십자가를 견뎌 내는 것이 아니며, 그것이 우리에게 떨어져 우리를 억누르게끔 놔두는 것도, 극기하듯이 고고한 태도로 참고 견뎌 내는 것도 아닙니다. 그보다는 그분의 십자가를 함께 나누어 지듯 그런 상황에서도 그분의 제자가 되고, 그런 고통 속에서도 그분과의 친교 안에서 살아가는 기회로써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분께서 먼저 우리의 십자가를 함께 짊어지셨기 때문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을 때 그분은 그 십자가로 우리의 모든 십자가를 짊어지셨습니다. 고통이 어떤 모습으로 다가오든 모든 고통 안에서 우리는 이미 그 고통을 당신의 것으로 삼으신 예수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지노 죠르다니는 여기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짊어졌던 키레네 사람 시몬의 역할이 바뀌는 것을 봅니다. 곧 “예수님께서 우리를 키레네 사람이 되게 하신다면 (십자가의) 무게는 덜해질 것”입니다. 계속해서 죠르다니는 만일 우리가 함께 이 십자가를 지고 간다면 그 무게는 더욱더 가벼워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한 사람이 십자가를 짊어지고 간다면 그에 짓눌리고 말겠지만, 여럿이 그들 가운데 예수님을 모시고 그것을 함께 짊어진다면, 다시 말해 키레네 사람처럼 예수님을 도와서 지고 간다면 그 십자가는 한결 가벼워질 것입니다. 그것은 편한 멍에가 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서로 일치하여 포승줄로 묶어 함께 그것을 들어올리는 과정은 하나의 축제가 될 것이며 그런 가운데서 그 십자가는 쉽게 들어올려질 것입니다.”1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십자가를 지고 가시니 나홀로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이 아님을 인식하고 그분과 함께 그것을 지고 가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께 속한다는 뜻입니다. 그분과의 충만한 친교를 이루고, 또 다른 그분이 되기에 이르도록 우리가 예수님께 속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렇게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고 그분의 참된 제자들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십자가는 참으로 우리에게, 그리스도께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힘”이(1코린 1,8), 부활의 길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약함 가운데 강인함을, 어두움 가운데 빛을, 죽음 가운데 생명을 찾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발견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파비오 챠르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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