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체꽃 (산토끼꽃과) 납작한 꽃이 하늘을 보고 줄기와 가지끝에 한송이씩 펴요. 찬찬히 보면 작은꽃이 수십개 모여 큰꽃 하나를 이루지요 실상 많은 것을 마음안에 갖고 사랑이라고 한 일들에 대해 반성을 해보네요. 임무 자체가 목적되어가고 있는지도 모르고..... 한송이를 이루는 작은꽃의 역활을 6월엔 제대로 해보리라 맘다지며~~!! 사진/글
최 마리안젤라
2015년 6월 생활말씀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루카 10,41-42). “마르타야, 마르타야.”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자애로이 마르타의 이름을 연거푸 부르십니다. 예루살렘 성 밖 베타니아의 집. 이곳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쉬어 가고자 잠시 머무르신 집입니다. 저 너머 성안에서는 논란이 벌어질 것이고, 반대와 거부에 시달릴 테지만, 이곳에서는 평화와 환대가 있을 따름입니다. 마르타는 주도적이고 적극적인 사람입니다. 오빠의 죽음 앞에서도 마르타는 짧은 대화 중이지만 열정적으로 예수님께 도움을 청합니다. 굳센 믿음을 보여주는 강한 여성 마르타는, “내가 부활이요 생명이라는 것을 믿느냐?”라는 질문에 주저 없이 이렇게 답합니다. “예, 주님! 저는 믿습니다”(요한 11,25-27 참조). 지금도 마르타는 스승과 그분 제자들을 융숭히 접대하느라 분주하게 움직입니다. 그는 이 집의 주인입니다. (‘마르타’라는 이름 자체가 ‘여자 집주인’을 뜻합니다.) 그러니 책임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아마 그는 손님들을 위해 저녁식사를 준비하고 있을 듯합니다. 그런데 그의 동생 마리아는 언니 홀로 분주하게 일하도록 내버려 두고는, 부엌에 나가보지 않고 남자들과 함께 예수님 발치에 앉아 그분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당시 소아시아 지역의 풍습을 거스르는 행위이지만, 영락없는 제자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마르타는 다소 화가 나서 이렇게 항의합니다.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루카 10,40). 이 말에 예수님께서는 애정 가득하고도 단호하신 말로 답하십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의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봉사를 기뻐하지 않으신 것일까요? 구체적인 환대가 그리 달갑지 않고, 그가 내어온 음료를 기꺼이 맛보실 생각이 없으셨던 것일까요? 이 일화가 나온 바로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통해, 자기 재능을 활용할 줄 알고 재산을 불릴 줄 아는 집사나 상인, 종들을 크게 칭찬하십니다(루카 12,42: 19,12-26 참조). 심지어 교활해 보이기까지 한 이들의 처신을 높이 사십니다(루카 16,1-8). 그러니 그토록 자발적으로 부지런하고도 넉넉하게 접대할 줄 아는 마르타를 대견해하시지 않으셨을 리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무라신 것은 그가 하고 있는 일에 쏟고 있는 염려와 걱정입니다. 마르타는 불안에 휘둘리고 있습니다.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하여”(루카 10,40) 침착성을 잃었습니다. 스스로 일을 이끌어 가기보다는 일에 주도권을 빼앗기고 떠밀려 일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제는 더 이상 자유롭지 않고, 일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우리도 때로 수없이 많은 일에 사로잡혀 향방을 잃지는 않나요? 인터넷이나 채팅 혹은 불필요한 문자 교환 등에 몰두하거나 주의를 빼앗기곤 합니다. 또 그보다 진지한 일이더라도 그 일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거나, 곁에 있는 사람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을 잊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 때문에, 또 누구를 위해 일하고 있는지를 망각하고, 일이나 그 밖의 임무 자체가 목적이 되게 하는 것이 무엇보다 위험한 일입니다. 또 우리는 여러 어려운 사정이나 문제 앞에서 불안과 근심에 휩싸이기도 합니다. 이는 가정 문제일 수도 있고, 경제 사정, 직장 문제, 학교 혹은 우리 자신이나 자녀들의 미래에 대한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문제에 사로잡혀 예수님께 들은 말씀조차 잊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이런 것들은 모두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마태 6,31-32). 우리 또한 예수님께 꾸중을 들어 마땅합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그럼 필요한 단 한 가지는 무엇인가요? 예수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 무엇도 그분 말씀보다, 말씀하시는 그분보다 먼저 올 수는 없습니다. 참으로 주님을 편히 모신다는 것은 그분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바로 모든 것을 잊고 예수님 발치에 앉아, 그분 말씀을 한 마디도 놓치지 않았던 마리아처럼 말입니다. 그러면 자기 과시욕에 휘둘리거나 혼자 앞서려 하기보다는 그분께서 기꺼워하시는 것을 하고, 그분 나라에 봉사하고 싶은 우리의 열정을 따르게 될 것입니다. 마르타처럼 우리도 ‘많은 일’을 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이익을 가져다주도록 부름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부께서 우리가 ‘많은 열매를’ 맺는 것을 기뻐하신다고(요한 15,8 참조), 심지어 우리가 당신보다 더 큰일도 하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요한 14,12 참조).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맡기신 일에 우리가 열(熱)과 성(誠)을 다하여 창의적이고 과감하면서도 자발적으로 전념할 것을 바라십니다. 그러나 염려나 걱정 없이, 자신이 하느님의 뜻을 하고 있음을 아는 사람만이 갖게 되는 그 평화를 지닐 것을 바라십니다. 그러므로 단 한 가지 중요한 것은 그분의 제자가 되어 우리 안에서 예수님께서 사시도록 해드리고, 매 순간 우리를 이끌어 주시는 그분의 조언, 그분의 작은 목소리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바로 그분께서 우리의 모든 행위에서 우리를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많은 일’을 하더라도 중심을 잃고 주의를 빼앗기지는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을 따르면서 오로지 사랑에 따라 움직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을 통해 늘 단 한 가지만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사랑하는 것입니다. 파비오 챠르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