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찔레꽃: 장미과
꽃말:
신중한사랑, 가족에 대한 그리움,자매우애 등 찔레꽃 향기에 반하여 킁킁거리며 숲을 지나며 꽃을 찾던 경험은 한번쯤은 했을 것이에요. 활짝핀 꽃을 들여다보니 벌과 개미랑 작은 곤충들이 얼마나 좋아하던지..... 그 누구도 배제하지 않으신 예수님의 마음을 볼수 있는 꽃이란 생각을 하였어요. 하느님은 사랑이라고 속삭이는 소리가 들리나~~~ 여?
2015년 8월 생활말씀 “여러분도 사랑 안에서 살아가십시오”(에페 5, 2). 이 말씀 안에 그리스도교의 윤리 전체가 들어 있습니다. 인간의 행위가 하느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셨을 때 생각하신 것과 같아지려면, 곧 참으로 인간적인 것이 되려면, 그 행위는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어야 합니다.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여정(‘인생’의 비유)은 모든 율법서의 요약인 사랑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에페소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방금 그리스도인다운 생활 방식으로 열거했던 모든 것, 곧 옛 인간에서 새 인간으로 넘어가고, 서로에게 진실하고 진지하게 대할 것이며, 도둑질을 하지 말고, 용서할 줄 알며, 선을 행하는 등의 그리스도인다운 생활 방식의 결론이자 요약으로 이런 권고를 합니다. 한 마디로 “사랑 안에서 살아가라”는 권고입니다. 이 한 달 동안 우리와 함께할 이 말씀을 발췌한 구절 전체를 한번 읽어 보는 것이 도움이 될 듯합니다. “그러므로 사랑받는 자녀답게 하느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또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는 향기로운 예물과 제물로 내놓으신 것처럼, 여러분도 사랑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바오로 사도는 우리 모든 행실의 모범으로 하느님과 같은 태도를 지녀야 한다고 확신했습니다. 만일 사랑이 하느님의 뚜렷한 징표라면 그것은 그분 자녀들의 징표가 되기도 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은 그것을 모방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하느님의 사랑을 알 수 있을까요? 바오로 사도에게는 아주 분명했습니다. 그 사랑은 예수님에게서 드러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어떻게, 그리고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보여 주셨습니다. 사도는 직접 그 사랑을 체험하고는, 그분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셨습니다”(갈라 2,20)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모든 사람들에게 그 사랑을 알려 주어 그것이 전 공동체의 체험이 되게 합니다. “여러분도 사랑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우리 사랑의 모범으로 삼아야 할 예수님의 사랑은 얼마나 큰 것인가요? 우리는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사랑은 끝이 없으며, 누구를 배제하거나 차별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두를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 당신 원수들을 위해서도,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고 있는 사람을 위해서도 돌아가셨습니다. 마치 성부께서 보편적인 사랑으로 착한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에게나, 죄인에게나 의로운 이에게나, 모든 이에게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비를 내려 주시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엇보다 작고 보잘것없는 이와 가난한 이들, 병자와 소외된 사람들을 보살피실 줄 아셨고, 벗들을 깊이 사랑하셨으며, 특히 당신 제자들 곁에 가까이 계셨습니다. 자신을 아끼지 않고, 당신 목숨을 내어 주실 정도로 그분의 사랑은 지극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당신의 사랑을 우리가 나누어 가지고, 당신께서 사랑하셨듯이 사랑하도록 우리 모든 사람들을 부르십니다. 이 부르심은 그에 따르는 요청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두려움을 안겨 줄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하느님처럼 모든 이를 항상, 먼저 사랑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그만큼 사랑할 수 있을까요? 이 달의 생활말씀이 우리에게 요청하듯이, 어떻게 “사랑 안에” 있을 수 있을까요? 그것은 오로지 먼저 우리 자신이 사랑받는 경험을 했을 때 가능해집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사랑 안에서 살아가십시오”라는 구절에서 '사랑하신 것처럼'이라는 표현은 '사랑하셨기 때문에'로도 번역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도 사랑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여기서 ‘살아가십시오’라는 말(역주 - 이탈리아어로는 ‘걸어가십시오 camminate’)은 ‘행동하십시오’, ‘처신하십시오’와 같은데, 곧 우리의 모든 행위는 사랑의 영감을 받아 사랑에서 비롯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아마도 바오로 사도는 결코 무심코 이런 역동적인 말로써 사랑은 배우는 것이고, 하느님만큼 큰마음을 갖기 위해서는 가야할 길이 멀다는 것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준 것은 아닐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꾸준한 발전의 필요성을 역설하기 위해, 갓난아기 때부터 성년에 이르는 성장(1코린 3,1-2 참조)이나 자라나는 나무, 집짓기, 경기장에서 상을 받기 위해 겨루는 경주(1코린 9,24 참조) 등의 다른 이미지를 활용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미 목표에 도달한 이들이 결코 아닙니다.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시간과 항구함이 필요합니다. 어려움 앞에 굴복하지 않고, 오류와 실수에 용기를 잃지 말고, 늘 다시 시작할 준비를 하며, 적당주의에 빠지지도 말아야 합니다. 히포의 주교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아마도 자신의 고통스런 여정을 생각하면서 이런 글을 남긴 듯합니다. "만일 당신이 아직 이르지 못한 경지에 도달하고 싶다면, 당신에게 유쾌하지 않은 것을 언제라도 감당해 낼 수 있기를 빕니다. 실제로 당신이 편하게 느껴지는 그 지점에서 당신은 멈춰서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이제 그만하면 충분해.’ 하지만 바로 그 때 당신은 좌초하게 됩니다. 끊임없이 길을 가도록 하십시오.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가는 길에서 오래 지체하지 말고, 뒤로 돌아서지도 말고, 길에서 벗어나지도 마십시오.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이는 뒤로 물러서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사랑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사랑의 길에서 어떻게 더 가속도를 낼 수 있을까요? 공동체에 속한 모든 이들이 초대되었으므로 - "여러분은 살아가십시오" - 서로서로 도와가는 것이 유익할 것입니다. 실제로 혼자서 하는 여행은 고달프고 힘겹습니다. 기회를 보아 친구들과 가족들, 같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구성원들 등 우리 사이에서 다시 한번 함께 살아가려는 뜻을 서로 밝히는 것으로 시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서로서로 배울 수 있도록 우리가 사랑했던 긍정적인 경험을 나눌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를 이해하는 사람에게 자신이 저지른 실수나 일탈(逸脫) 등을 털어놓음으로써 더 나아지는 계기로 삼을 수도 있습니다. 함께 드리는 기도도 우리에게 빛과 힘을 주어 앞으로 나아가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서로가 하나 되고, 우리 가운데 계신 예수님(그분은 ‘길’이십니다!)과 하나 되어 우리의 '거룩한 여행'을 진지하게 계속하며, 주변에 사랑을 심으면서, 목표에 도달하게 될 것입니다. 그 목표점은 사랑입니다. 파비오 챠르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