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꿩의 다리 ( 미나리아재비과 여러해살이풀)

꽃말: 키다리인형

가지가 꿩의다리 같이 가늘다고 붙은 이름이라네요.

축령산 숲에서 만났을 때 우거진 초록 사이서 어찌나 이쁘게 빛나던지...발길을 멈추었어요

들풀은 들여다 봐 달라고 사람들이 자주 지나는 길가에서 핀다는데...

조금은 숨은 듯 보여 맘이 짜~안 했어요.

이들도 주변에 새로운 희망으로 곧 번져 나가겠지~~~여~~!!

 

2015년 10월 생활말씀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요한13, 35).

이는 그리스도인의 표지(標識)이자 신분증, 특징입니다. 적어도 그렇게 되려고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공동체를 그렇게 생각하셨기 때문입니다.

초대 그리스도교 정신에 관한 매우 흥미로운 글, 『디오그네투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보면 “그리스도인들은 사는 지역이나 말하는 방식, 입는 의복으로도 다른 사람들과 구분되지 않습니다. 실제로 어떤 특정한 도시에서 사는 것이 아니고, 어떤 특별한 언어를 사용하지도 않으며, 독특한 생활방식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라고 적혀 있습니다. 그만큼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모든 이들과 마찬가지로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에게는 사회에 깊이 영향을 미치고, 그 사회의 영혼 역할을 할 수 있는 비결이 있습니다. (5-6장 참조).

이는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직전 당신 제자들에게 주신 비결입니다. 이스라엘의 옛 현인들처럼, 아들 앞에 선 아버지처럼, 지혜의 대가(大家)이신 예수님께서도 살아가는 방법, 제대로 사는 법을 유산으로 남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성부께로부터 직접 그 방법을 배우셨습니다.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 주었다.” (요한 15,15) 그것은 예수님께서 성부와의 관계에서 체험하신 결실이었습니다. 곧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마지막 바람, 예수님의 유언이며, 당신께서 이 땅 위로 가져오셨고, 우리 삶이 되도록 우리에게 나누어 주신 하늘나라의 삶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것이 당신 제자들의 정체성이 되기를, 곧 서로 간의 사랑이 그들을 알아보는 특성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그들 서로 간에 감도는 사랑으로 알아볼 수 있나요? 요한 바오로 2세는 “교회의 역사는 성덕의 역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를 거스르는 나쁜 표양을 보여 준 사건들도 적지 않았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강생의 신비」, 11). 그리스도인들은 수세기 동안 예수님의 이름으로 끊임없이 전쟁을 치렀고, 계속 서로 분열되어 있습니다. 지금도 그리스도인들 하면 십자군이나 종교재판을 떠올리거나, 과학의 발전을 거슬러 구시대의 도덕관을 극구 옹호하는 이들로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살렘에서 태어나던 공동체의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달랐습니다. 사람들은 그 공동체 사람들이 실천하던 재산의 공유나, 그들 사이에서 감도는 일치, 그들 특유의 “즐겁고 순박한 마음”(사도2,46 참조)에 경탄했습니다. 또 사도 행전을 읽다 보면 “백성은 그들을 존경하여’, 그 결과로 매일 “주님을 믿는 남녀 신자들의 무리가 더욱더 늘어났다.”(사도 5,13-14)고 합니다. 공동체가 보여 준 삶의 증거는 매우 큰 호감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오늘날에도 우리는 사랑으로 다른 이들과 구별되는 사람들로 알려지지 못하는 것일까요? 우리가 예수님의 계명을 어떻게 해 버린 것일까요?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전통적으로 가톨릭에서 10월은 ‘전교의 달’로, 온 세상에 나아가 복음을 선포하라고 하신 예수님 말씀을 묵상하고, 선교 일선에서 일하는 이들을 위한 지원 및 기도에 전념하고 있습니다. 이번 달 생활말씀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는 모든 선포의 근본적인 측면을 재조명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신앙을 강요하거나 개종을 목표로 하지 않으며, 회개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가난한 이들에게 이해타산적인 도움을 주는 것도 아닙니다. 또 본질적으로 도덕적 가치만을 옹호하거나 불의 또는 전쟁 앞에서 확고한 입장을 견지하는 것도 아닙니다. 비록 그렇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 피해 갈 수 없는 마땅한 태도일지라도 그것이 최우선 과제는 아닙니다.

무엇보다 먼저 그리스도인의 선포는 예수님의 제자라면 모두가 전해 주어야 하는 개인적인 삶의 증거입니다. “현대인은 스승의 말보다 좋은 표양을 주는 사람들의 말을 기꺼이 듣습니다” (『현대의 복음 선교』, 67). 교회에 적대적인 사람들도 종종 병자와 가난한 이들에게 헌신하는 사람들과, 언제든 가장 힘없는 이들 가까이서 도움을 주기 위해 고국을 떠나 오지로 갈 태세가 되어 있는 이들이 보여 주는 모범에 감명을 받곤 합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청하시는 좋은 표양은 하나의 공동체 전체가 함께 복음의 진리를 보여 주는 모습입니다. 그 공동체는 예수님께서 가져오신 삶을 통해 진정 하나의 새로운 사회, 모두가 진정한 형제애를 실천하고, 서로에게 도움을 주고 봉사하며, 한 마음으로 힘없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더 관심을 기울이며 살아가는 새로운 사회가 탄생할 수 있음을 보여 주어야 할 것입니다.

교회 역사에 이와 유사한 증거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남아메리카에서 프란치스코회나 예수회가 원주민을 위해 건설했던 마을이나 수도회들 주변에 태어난 촌락들이 그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여러 교회 공동체와 운동에서 증거의 소도시들이 탄생하여, 복음에 따른 삶과 서로 간의 사랑의 결실인 새로운 사회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가 자신이 살아가는 장소나 만나는 사람들과 무관하게 살지 않고 예수님께서 목숨까지 바쳐 이루게 해 주신 그 일치를 우리 사이에서 실천한다면, 우리는 다른 대안적인 생활 방식을 만들어 내어, 우리 주변에 새로운 희망과 생명의 씨앗을 뿌릴 수 있을 것입니다. 이를테면 한 가정이 구체적으로 서로 간의 사랑을 실천하려는 뜻을 매일같이 새로이 다짐한다면, 그 가정은 그들이 살고 있는 아파트나 이웃에 팽배한 서로 간의 무관심에 한 줄기 빛을 던져 줄 수 있을 것입니다. 또 ‘환경세포’, 곧 직장, 학교, 노조, 관청, 교도소 등지에서 복음의 요청을 근본적으로 실천하기로 약속한 두 사람 이상의 모임은, 권력투쟁의 논리를 뿌리 뽑고, 협력의 분위기를 만들어 아무도 예상치 못한 형제애가 싹 트게 만들 수도 있을 것입니다.

로마 시대에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바로 그렇게 하지 않았던가요? 그들은 이런 방식으로 모든 것을 변화시키는 참신한 그리스도교 정신을 확산시키지 않았던가요? 오늘날 그 ‘초대 그리스도인’들처럼 우리도 서로 용서하고, 늘 서로를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며, 함께 도와가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한마디로 우리는 우리 가운데 계신 예수님께서 이 거룩한 사랑의 논리 안에 다른 이들도 동참하게 만드실 수 있음을 믿으며, 그분께서 사랑하셨던 것만큼 서로를 깊이 사랑하도록 부름받은 ‘초대 그리스도인’들입니다.

파비오 챠르디

 

    스마트폰에서 www.liun.pe.kr 로 들어 가시면 항상 생활말씀을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