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로베리힐 (장미과)

분홍장미 꽃말: 행복한사랑, 사랑의맹세

한로 지나 피는 장미꽃들을 보았어요.  장미를 정원에서 보자는 장미애호가들의 정원에

늦가을이 맞나 싶게 담을 타고 곱게 곱게 피었어요.

장미는 다른 어떤 꽃보다 사람과의 상호관계를 많이 할수 있는 꽃이라고 하네요.

스트로베리힐은 우리나라 남부서 볼수 있는 반들가시나무와 같은 품종이라는데...

잎이 두껍고 반들거린다해서...그래서 더 정감이 갔어요.

성모님과 장미는 뗄수 없는 관계여서 더욱더...

갈라진 우리의 일치를 위해 오신 예수님

그분이 오시도록 통로가 되신분~~!!

 

2015년 11월 생활말씀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요한 17, 21).

 

예수님께서는 이 마지막 기도를 통해 성부께 당신 마음속 깊이 품고 계시던 것을 간절히 청하십니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인류를 당신 가정으로 만드시어 가족들과 더불어 심지어 당신의 거룩한 삶 자체까지 포함하여 모든 좋은 것을 함께 나누고자 하셨습니다. 부모라면 자녀들이 서로 사랑하고, 도와주며, 일치되어 살아가는 것 이상으로 무엇을 더 바랄 것이 있겠습니까? 자녀들이 시기심이나 경제적 이해타산 때문에 서로 갈라지고, 심지어 더 이상 서로 말도 건네지 않게 되는 시점에 이른 모습을 보는 것보다 부모를 더 크게 상심시키는 것이 있을까요? 하느님께서도 영원으로부터 언제나 당신 자녀들이 당신과의 관계에서는 물론, 그들 서로 간에도 사랑의 친교 속에서 일치된 가정을 이루기를 바라셨습니다.

창세기의 극적인 일화들은 죄를 저지르고, 서서히 산산조각 나는 인류 가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창세기를 읽자면, 남자는 여자를 고발하고, 카인은 자기 동생을 죽이며, 라멕은 분별없이 경솔하게 보복을 자랑하고, 바벨에서는 사람들이 서로 이해하지 못하게 되어, 온 땅으로 흩어지는 등, 하느님의 계획이 마치 실패로 끝나는 듯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대로 포기하지 않으시고 기어코 인류 가정을 다시 화합시키려 하십니다. 역사는 그렇게 노아에게서 다시 시작되고, 아브람의 선택, 뽑힌 민족의 탄생으로도 다시 시작되어 계속 진행되어 나아갑니다. 그러다가 하느님께서는 직접 당신 아드님에게 막중한 사명을 맡겨 이 땅에 보내기로 결정하시기에 이릅니다. 그렇게 흩어진 자녀들을 한 가정으로 모아들이고, 길 잃은 양들을 무리 안으로 불러 모으며, 민족들 사이를 가르는 적개심의 장벽을 허물어 하나의 새로운 민족을 창조하는 사명을 맡기십니다(에페 2,14-16 참조).

하느님께서는 결코 일치를 포기하지 않으시며, 바로 이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위해 당신께서 성부께 부탁드릴 수 있는 가장 귀한 선물로서 그 일치를 청하십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각 가정에는 부모의 흔적이 새겨져 있기 마련입니다. 하느님께서 만드신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이십니다. 단지 당신 피조물을 사랑하시기 때문만이 아니라, 거룩하신 세 위격께서 각자 사이에서 서로를 내어 주고 친교를 이루는 그 자체로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인류를 창조하실 때 당신 모상으로 만드셨고, 그 안에 당신처럼 관계를 맺는 능력을 새겨 넣어 주시어, 각자 서로 자신을 선물하며 살아갈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이달에 우리가 살아가고자 하는 예수님 기도의 전체 구절은 실제로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입니다. 우리 일치의 모범은 성부와 예수님 사이에 존재하는 그 일치,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보면 우리 인간에게는 가당치 않을 만큼 일치는 깊고도 심오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있듯이’ 덕분에 이 기도는 실현 가능해집니다. 그 ‘있듯이’는 ‘있기 때문에’를 뜻합니다. 곧 성부와 예수님이 하나이듯 우리도 일치를 이룰 수 있는 것은, 바로 그분들께서 당신들의 일치 안에 우리를 동참시켜 주시고, 우리에게 이 일치를 선물로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예수님의 과업은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부와 하나이듯이 우리 모두가 하나 되게 하고, 한 가정, 한 민족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셨고, 우리의 분열과 죄를 짊어지시어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우리를 일치로 이끌어 주시기 위해 당신께서 몸소 가실 길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나는 땅에서 들어 올려지면 모든 사람을 나에게 이끌어 들일 것이다”(요한 12, 32). 대사제가 예언했듯이 그분께서는 “…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려고 돌아가셔야만 했습니다”(요한 11, 52 참조). 당신 죽음과 부활의 신비 안에 모든 것을 한데 모으셨고(에페소 1,10 참조) 죄로 조각난 일치를 재건하셨으며, 성부를 중심으로 가정을 다시 이루셨고, 우리를 다시 형제자매가 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사명을 이루셨습니다. 이제 그분 기도에 대한 우리의 몫, 우리의 응답, 우리의 “네”만 남아 있습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우리는 이 기도를 실현시키는 데 어떻게 기여할 수 있을까요?

무엇보다 우리의 몫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우리의 입술과 마음을 빌려 드려 계속해서 성부께 이 말씀을 드리고, 매일같이 신뢰를 갖고, 당신 기도를 다시 되풀이하실 수 있게 해 드리는 것입니다. 일치는 드높은 곳에서 오는 선물로, 지침 없이 믿음을 갖고 청해야 합니다.

그밖에도 우리는 늘 일치를 염두에 두고, 그것을 우리의 가장 큰 소망으로 여겨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꿈이라면, 또한 우리의 꿈이 되기를 바랍니다. 가끔씩 어떤 결정과 선택, 행동을 하기에 앞서 한번 이렇게 자문해 보도록 합시다. 이것이 일치를 건설하기 위해 필요한가? 일치를 위해 이것이 최선인가?

마지막으로 우리는 불일치가 더욱 분명히 드러나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 예수님께서 하셨듯이 그 불일치를 짊어져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가정의 불화나, 지인들 사이의 갈등이 될 수도 있을 것이고, 내가 사는 동네의 크고 작은 긴장 상황이나 직장이나 본당의 불일치, 혹은 교회 간의 불화일 수도 있습니다. 다툼이나 몰이해를 피하지 말고 무관심으로 일관하지 않으며, 그곳에 자기 몫의 사랑을 가져가도록 하십시오. 상대방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관심을 가져주며, 그 분열의 상처로 생겨난 고통을 함께 나누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무엇보다 예수님의 이상과 그분의 기도를 기꺼이 함께 나누고자 하는 이들과 더불어 일치를 이루며 살아가도록 합시다. 견해나 생각의 차이에 지나치게 비중을 두지 말고, ‘불일치 안에서 완전한 것보다 일치 안에서 불완전한 것’에 만족하면서, 다름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것은 물론, 오히려 그 다름을 일치를 이루기 위한 자산으로 여겨야 할 것입니다. 일치는 결코 획일화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때로는 그 때문에 우리 자신이 십자가에 매달리기도 하겠지만, 바로 이것이 인류 가정의 일치를 다시 이루기 위해 예수님께서 선택하신 길이며, 우리도 그분과 함께 가고자 하는 바로 그 길입니다.

파비오 챠르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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