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명자나무:
(낙엽관목 장미과)
꽃말:
겸손,평범,조숙
지방마다
애기씨꽃, 아가씨꽃,각시꽃이라 부르는 우리나라서 흔하게
볼수 있는 관상용에요.
전래에
여인들이 아름다운 명자꽃을 보면 봄바람이 난다하여 집안에
심지 않았다해요.
빨강색의
꽃이 피는 나무 종류는 손에 꼽아요. 장미,동백,석류..그리고
명자
결코
화려하지 않으며 적당히 곱고 은은한 향기로 보는이의 마음을
평안하게 하는 꽃
꽃말처럼
겸손하고 평범으로 서로사랑한다면 평화는 거기에 있겠지~~요?!!
(사진,
글; 최 마리안젤라)
생활말씀 2016_06월
“너희는 서로 평화롭게 지내라.” (마르 9,50 참조) 인류에게 상처를 가져다주는 세계 도처의 갈등들 속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이 평화의 초대는 얼마나 우리 마음 깊이 파고드는 말씀인지요. 예수님께서 곧 평화 자체이시고, 당신의 평화를 주시겠다고 우리에게 약속하셨음을 생각하면 희망이 솟아오릅니다. 마르코 복음서는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의 집에 모인 제자들에게 하신 여러 말씀 끝에, 당신의 공동체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를 설명하신 이 말씀을 전합니다. 결론은 분명합니다. 모든 것이 평화를 가져와야 하며, 그 안에 모든 선이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정과 직장에서나, 정치적 성향이 다른 사람과도 더불어서 우리 일상에서 이 평화를 체험하도록 불렸습니다. 만일 우리가 항상 더 진실하고 깊은 일치를 원한다면, 반대에 부딪힐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서로 허심탄회하게 의견을 나누며 그 평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또한 이 평화를 위해서는 우리 사이의 사랑의 관계가 결코 약해지지 않도록 돌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 사이에 존재할 수 있는 그 어떤 차이점보다 그 상대방이 더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끼아라 루빅은 “일치와 서로 간의 사랑이 도달하는 모든 곳에는 평화가, 참 평화가 온다.”고 했습니다. “서로 간의 사랑이 있는 곳에는 틀림없이 우리 가운데 예수님의 현존이 있고, 예수님이야말로 평화, 최고의 평화이시기 때문입니다.”1) 끼아라 루빅의 일치의 이상은 제2차 세계대전 중 태어나, 곧바로 갖은 증오와 갈가리 찢긴 상처의 해결책으로 대두되었습니다. 그때부터 끼아라는, 새롭게 나타나는 모든 갈등 앞에서 끊임없이 복음적 사랑의 논리를 제시했습니다. 예를 들어 1990년 이라크에서 전쟁이 발발했을 때, 끼아라는 “이미 사장(死藏)된 것으로 생각해 왔던 말들인 ‘적’, ‘적군’, ‘교전이 시작되었다’거나, 전쟁 포고, 전쟁 포로, 패전 (……) 같은 표현이 들려오는 것에 대해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비통하게도 우리는, 그리스도교 정신의 근본 원칙, 예수님의 첫째가는 ‘계명’, 그 ‘새 계명’이 몹시 훼손된 것을 깨달았습니다. (……) 인류는 서로 사랑하고, 서로를 위해 죽을 준비가 되어 있는 대신” 또 다시 경멸, 고문, 살해 등 “증오의 구렁텅이에” 떨어졌습니다.2) 그러기에 우리가 어떻게 거기서 벗어날 수 있을지 자문하곤 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곳에서부터 새로운 관계를 맺어 가거나, 이미 존재하는 관계들을 더욱 깊이 다져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과 이슬람교도나 유다인들 등 다른 유일신을 섬기는 종교 신자들 사이에서 그 관계를 다져야 할 것입니다.”3) 곧 충돌을 빚고 있는 이들 사이의 관계를 말합니다. 다른 온갖 종류의 갈등 상황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개개인과 민족들 사이에서 상호 경청과 도움과, 사랑의 관계를 형성해야 합니다. 끼아라는 나아가, “서로를 위해 죽을 준비가 되어 있기까지” 그렇게 하기를 권합니다. 매번 완전히 다 알아듣지는 못할 것을 알고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상대방의 생각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의 생각을 잠시 한편으로 제쳐 두어야 합니다. 그러면 아마 상대방도 때로는 내 생각을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나를 똑같이 그렇게 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 다르고 잘 이해할 수도 없지만, 상대방을 향해 자신을 열어 두고 관계를 지켜 나가는 일을 우선시하고자 합니다. 복음에서는 마치 하나의 명령처럼 “평화롭게 지내라”고 제안합니다. 그것을 명령으로 제안한 것은 진지하고 끈질긴 노력이 필요하다는 징표입니다. 이는 우리가 서로에게 갖도록 부름받은 사랑과 자비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표현 중 하나입니다. 파비오 챠르디 신부 1)
1988년 9월 16일, 독일 바이에른 지방 텔레비전 방송 2)
1991년 2월 28일, “함께 성인이(Santi insieme)” 중, 치타누오바, 로마 1994년, 63-64쪽. 3)
1991년 2월 28일, “함께 성인이(Santi insieme)” 중, 치타누오바, 로마 1994년, 68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