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 계산리에서 촬영한 청노루귀 ; 정태홍 아오스딩

 2025년 3월 생활말씀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루카 6,41)

 

(이번 달 생활말씀에서는) 예수님께서 산에서 밤새워 기도하신 후 당신의 사도들을 뽑으십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평지에 이르시자, 제자들에게 긴 말씀을 이어 가시는데, 참 행복을 선포하는 말씀부터 시작하십니다. 루카 복음은 마태오 복음과는 달리 참 행복을 지닌 네 부류의 사람들에 대해서만 언급합니다. 이는 가난한 사람들, 지금 굶주린 사람들, 지금 우는 사람들, 그리고 박해를 받는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박해받는 사람들이란 미움을 받고, 사람의 아들 때문에 쫓겨나며 모욕과 중상을 받는 사람들이라고 루카 복음은 말합니다. 한편 이에 대비되는 사람들, 즉 부유한 사람들, 지금 배부른 사람들, 지금 웃는 사람들, 그리고 오만한 사람들에 대한 경고도 덧붙입니다. 하느님께서 이렇게 가장 보잘것없는 이들을 특별히 사랑하시는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이들에 대한 우선적 사랑을 당신의 소명으로 삼으시면서 나자렛의 회당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하십니다.“(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계속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격려하십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까닭을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라고 하신 말씀에 담긴 하느님 아버지의 모습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분명히 강조하신 말씀 이후, 다음과 같은 선언도 이어집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 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루카 6,37)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하나의 비대칭 이미지를 의도적으로 사용하시면서 이렇게 훈계하십니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얼마나 여러 번 이렇게 끔찍한 경험을 하는지요. 어떤 형제나 자매의 잘못과 약점들을 - 때로는 혹독하다고 할 정도로까지 - 비판하곤 합니다. 이렇게 하면서 우리는 마치 하느님께서만 지니실 수 있는 특권을 우리도 지니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게 됩니다. 사실 우리의 눈에서 ‘들보를 빼내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이 계속 하느님의 용서가 필요한 죄인임을 인식하는 것으로부터 생겨나는, 바로 그 겸손이 필요합니다. 자신의 ‘들보’를 인식하고 회개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용기 있게 모색하는 사람만이, 판단하지 않고 과장하지 않으면서,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나약함과 약점들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또한, 그저 상황이 지나가도록 우리가 눈을 감은 채 내버려두기를 권하시지는 않습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이 새로운 삶의 길에서 계속 앞으로 나아가면서, 서로서로 도와주기를 바라십니다. 바오로 사도 역시 거듭 당부합니다. 곧 다른 사람들을 걱정해 주고, 무질서하게 지내는 이들을 타이르며, 소심한 이들을 격려하고, 약한 이들을 도와주며, 참을성 있게 모든 사람을 대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직 사랑만이 이렇게 봉사할 수 있도록 합니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이 생활말씀을 어떻게 실천해야 할까요? 이미 언급된 내용 외에도 우리는 이번 사순 시기부터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보시는 방식대로, 그리고 하느님께서 사람들을 보시는 방식대로 사람들을 보게 해 주십사고 청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마음의 눈으로 보십니다. 하느님의 눈길은 사랑의 눈길이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이탈리아) 트렌토에서 포콜라레가 처음 시작되었을 때, 첫 번째 그룹의 젊은 여성들에게 매우 결정적 역할을 해 주었던, 다음과 같은 행동 방식을 우리도 다시 받아들여 실천해 보면서 서로서로 도울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끼아라 루빅은 한 그룹의 이슬람 신자 친구들에게 다음과 같이 이 행동 방식에 대해 말했습니다. “처음에는 사랑을 근본적으로 철저하게 살아 내는 것이 항상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 우리 사이에도 관계 면에서 먼지가 쌓일 수 있었고, 일치가 점차 약해질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일은 실제로 일어나곤 했는데, 예를 들어 우리가 다른 이들의 결점과 불완전한 모습들을 알게 되고 그들을 판단하게 될 때면, 서로 간의 사랑의 기류가 점차 냉랭해지곤 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자비의 서약’이라고 부른 한 가지 서약을 우리 서로에게 하는 날을 갖기로 했습니다. 이로써 우리가 - 집이나 학교나 직장 등지에서 - 만나곤 하던 이웃을 매일 아침 새롭게 바라보기로 했습니다. 즉 그 사람의 결점들을 전혀 떠올리지 않고, 오히려 사랑으로 모든 것을 감싸 주면서 그를 새롭게 바라보기로 했던 것입니다. (···) 그것은 당시에 우리가 모두 함께 실천하기로 했던 강도 높은 노력의 일환이었고,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모습을 따라, 우리도 사랑하는 데 있어서 항상 먼저 사랑하는 사람이 되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아우구스토 파로디 레예스

포콜라레운동 국제 본부 「생활말씀」 편집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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